빼앗김의 방관 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 故박혜정 - 이혜경, 길 위의 집 - 동네서점 사각공간思覺空間
인기는 사진 뒤에 끼워둔, 조그마하게 오려둔 종이를 꺼냈다. 시사 잡지에서 오려낸 글귀. 그때 그 자리에서, 며칠 동안의 부재, 다시 또 그런 상황에 놓이더라도, 그 목소리의 이물스러움을 견디지 못할 것임을 아는 인기를 가격한 글귀. 지난 봄에 투신한 여학생이 남긴 유서의 일부분. 아파하면서 살아갈 용기 없는 자, 부끄럽게 죽을 것.살아감의 아픔을 함께 할 자신 없는 자, 부끄러운 삶일 뿐 아니라…….이 땅의 없는 자, 억눌린 자, 부당함에 빼앗김의 방관.더 보태어 함께 빼앗음의 죄, 더 이상 죄지음의 빚짐을 감당할 수 없다…….─故 박혜정의 유서에서 _이혜경, 『길 위의 집』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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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3일, 故전태일,『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어디서 얻어쓴 건지 기름에 쩔은 운전수 모자를 쓰고, 바지는 군복바지에 흰 고무신을 신었네. 런닝샤쓰는 구멍이 벌집처럼 뚫린 것을 입고 오른 손엔 목장갑을 끼었는데, 손가락은 다섯 개가 다 나오고 손바닥 부분만 장갑구실을 하는 것일세. 얼굴은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꼭 마도로스가 지평선을 바라보는 그런 표정일세. 그저 무의미하게,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사는 사람 같았네. 삽질을 하나 점심을 먹으나 시종 무표정일세. 만약에 그 기름에 쩔은 운전수 모자를 벗겨버린다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바보가 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네. 그만큼 그 모자는 그 사람을, 그 돌부처 같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사람 전체를, 육체의 맨 꼭대기인 머리 위에 서서 감독하면서, 그를 속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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