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서 얻어쓴 건지 기름에 쩔은 운전수 모자를 쓰고, 바지는 군복바지에 흰 고무신을 신었네. 런닝샤쓰는 구멍이 벌집처럼 뚫린 것을 입고 오른 손엔 목장갑을 끼었는데, 손가락은 다섯 개가 다 나오고 손바닥 부분만 장갑구실을 하는 것일세.
얼굴은 일을 할 때나, 쉴 때나 꼭 마도로스가 지평선을 바라보는 그런 표정일세. 그저 무의미하게, 사물을 판단하지 않고 사는 사람 같았네. 삽질을 하나 점심을 먹으나 시종 무표정일세. 만약에 그 기름에 쩔은 운전수 모자를 벗겨버린다면, 그 사람은 그 자리에서 쓰러져 바보가 되지 않으면 죽어버릴 것 같네. 그만큼 그 모자는 그 사람을, 그 돌부처 같은, 어떻게 표현할 수 없는 그런 얼굴을 하고 있는 그 사람 전체를, 육체의 맨 꼭대기인 머리 위에 서서 감독하면서, 그를 속세의 사람과 같이 만들어버리고 있었네. 지금 현재 삽질을 하고 있으니 말일세.
사실 그 사람이 삽질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세.
그 때에 절은 모자가 하고 있는 걸세.
얼마나 위로해야 할 나의 전체의 일부냐!
얼마나 불쌍한 현실의 패자(敗者)냐!
얼마나 몸서리치는 사회의 한 색깔이냐!
그렇다! 저주받아야 할 불합리한 현실이 쓰다 버린 쪽박이다! 쪽박을 쓰기 시작했으면 끝까지 부서지지 않게 잘 쓰든지, 아니면 아예 쓰지를 말든지,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고 그저 무자비하게
사회는 자기 하나를 위해 이 어질고 착한, 반항하지 못하는, 마도로스 모자를 쓴 한 인간을, 아니 저희들의 전체의 일부를 메마른 길바닥 위에다 아무렇게나 내던져 버렸다.
이 가엾은 인간은, 처음 얼마간은 뜨거운 길바닥에서 정신을 못차린 채로 얼마를 지내고, 또 정신을 차리고 얼마간의 시간을 보내고, 또 의지와 자존심으로 얼마를 보내고, 마침내 금이 간 쪽박은 뜨거운 열기에 물기가 증발되어 말라 비틀어져서 두 쪽이 난다.
그 중 한쪽은 자진해서 쓰레기통에 기어들어가 눈을 감고 죽어버렸다. 또 한쪽, 떨어져 나간 한쪽은 어떻게든지 다시 물기를 빨아들여 비틀어졌던 육체를 다시 펴고, 어떡해든 그 전체 속에 다시 뭉쳐보기를 희망하는 것일 거야.
그런데 내 앞에 선 이 반쪽은, 희망하는 것이 아니라 떨어져 나간 반쪽을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애. 지난 날 그 많은 양이 물을 삼키던 그 반쪽을 말일세.
나도 예외는 아닐세.
그렇지만 나는, 그 속에 뭉치지를 않고,
그 뭉친 덩어리를 전부 분해(分解)해 버리겠네.
_故전태일,『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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