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80년대 후반을 이릅니다) 우리나라 청소년들이 부모들의 과잉기대에 지쳐 자살하는 일이 많은데, 그들은 부모들이 갖고 있는 자식에 대한 '극진한 사랑'의 희생물이 아니라, 부모들이 갖고 있는 '죽음에의 두려움'의 대상물(代償物)로 희생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그래서 옛부터 많은 성인(聖人)들은 죽음에의 두려움을 끊어 없애버리라고 가르쳐왔다. 특히 석가모니는 생사일여(生死一如)의 경지를 강조하여 공즉시색(空即是色), 색즉시공이므로 있는 것이나 없는 것이나 같으니 삶과 죽음이 다를 것이 없다고 강조하였다. 일체의 집착으로부터 해탈할 수 있을 때 거기서 열반의 경지가 열리게 되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의 경지란 영원히 사는 세계가 아니라 진짜로 죽어 없어지는, 무(無)로 돌아가 버리는 경지를 말하는 것이다. (…) 영원히 죽으려고 참선을 하고 수도를 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라. 우리가 만약 잠을 자지 않고 매일매일 깨어 있는 채로 일만 계속해야 한다면 얼마나 고달플 것인가. 윤회를 피할 수 없는 중생의 경지가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죽어도 죽지 않는 삶, 영원히 이어져 나가야 하는 고통의 세계, 그것이 바로 우리가 그토록 바라는 영원한 삶인 것이다.이 가을엔, 우리가 잠깐만이라도 죽음에 대하여 생각해 볼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해봐야겠다. 진정한 죽음은 영원한 휴식이요, 무(無)이다. 완전한 각자(覺者)가 되어 열반의 경지에 들어가지는 못한다고 할지라도 우리가 죽음의 문제에 좀더 담담해질 수 있다면, 죽기 전에 무언가를 남겨 놓으려고 아등바등하지 않게 된다면, 우리는 비로소 진짜 평정한 마음의 휴식을 가질 수 있다.(…) 독생독사(獨生獨死), 독거독래(獨去獨來),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 같은 말들은 흔해빠진 얘기들 같지만 많은 가르침을 우리에게 준다. 죽음을 담담히 맞아들일 수 있을 때 우리는 의외로 많은 소득을 얻을 수도 있다. 필사즉생(必死卽生)이라는 말이 있듯이, 죽으려고 하면 오히려 살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관계들로부터 탈출하여, 홀로 죽음을 사색할 수 있는 시간을 이 가을에 가져보도록 하자. 거기서 오히려 초월적 체념(諦念)의 길이 열리고, 우리는 범백(凡百)의 잡사(雜事)들로부터 자유로와질 수 있을 것이다. 이 가을이, 물질만능주의에 사로잡힌 우리나라의 중생들에게 조금이나마 평화스런 허심(虛心)의 세계를 선사해주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1988.9.)_마광수, 『나는 야한 여자가 좋다』 中
[言]common plac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