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yer. 1
(…)
피해자는 결국은 감정이 섬세한 쪽인 셈이다.
허사로 돌아가는 끊임없는 동작을 지켜보는 것은 괴로운 즐거움이었다.
(…)
본다는 것은 이미 약속을 깨뜨리기 시작한 거나 마찬가지였다.
_황석영, 「섬섬 옥수」 中
Layer. 2
시인이여,
토씨 하나
찾아 천지를 돈다
시인이 먹는 밥, 비웃지 마라
_진이정,詩 「시인」 中
Layer. 3
(…)
人生은 살기 어렵다는 데
詩가 이렇게 쉽게 씨워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_윤동주,詩 「쉽게 씨워진 詩」 中 (*표기는 복각본을 따름)
『피로 사회』, 구성원의 삶/생명(력)을 소진(burn-out)시켜 제 번영을 꾀하는 사회. 아, 그 자본주의. 뼈가 저릿한 순간을 하루에도 몇 번씩 겪고 있으니 모르는 건 아닐텐데 그것이 문제이고 그 때문인줄 알지만! 알아도.. 다른 도리 찾자면 당장(當場), 일용할 양식을 구하고 있는 그 현장에서 밀려나는 판이니 충실하지 않을래야 않을 수 없는 각자도생. 포도청인 목구멍의 호령따라 넘기는 식물(食物)은, 그러나 달콤하기도 한 바. '보이지 않는 손(invisible hand)' 또한 족쇄이기만 한 것은 아니어서 그 뒤로 자기자신을 숨길 수도 있으니. 이를테면 자본주의 미소 장착 후 乙로서 감정노동의 일과를 수행. 이후 손에 쥔 알량한 금권을 앞세워 소규모 탕진을 치르는 군소 甲으로 전화. 甲과 乙 사이를 오가는, 스위칭을 일상으로 구가하는 사이 '나'는 이미 자본주의-기계. 허나 그러는 사이 뒤로 숨는다, 곧 숨겼다 여긴 '나'는 마치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잊혀지고 잃어버린 것이 되어 흔적조차 찾기 어려워지니, 소외..
그런 중에도 쓴다, 이 쓰는 행위는 예의 그 -기계라는 格을 破하며 그 속 어딘가에 매몰된 채로 잊힌, 잃어버린 '나' 곧 자신이라는 이 생명을 복원하도록 돕는 것. 따라서 반성이, 그리고 재구성과 이를 토대로 하는 희망이 쓰기에서 비롯될 밖에. 이 cycle, 내면의 순환계. 이것이야말로 곧 생명-力! 쓰기 위해 반추, 본다는 행위를 통해 이미 머리에 들이고 마음에 새긴 것을 Re-Load. '본다는 것은 이미 약속[旣成]을 깨뜨리기 시작한' 것.
感을 촘촘히 엮어야만 情은 비로소 굳건하여져서 유연하되 흔들림없이 자릴 지킬 수 있는 것. 섬(纖)과 세(細)의 감(感)을 골고루 경험해야 할 터이니 '피해자' 아닐 수 없는 바, 비록 끝끝내 무일물(無一物)의 허사(虛事)로 귀결될 삶일지언정 '괴로운 즐거움'을 끊임없이 작동시킬 때 풍요 누리게 되는 것. 이것이 삶의 본질 아닐까. 아니 고런 때에라야만 겨우 '일순일순 팽팽한 충일감'(*전혜린) 누리며 사는 것.
쓰기를 주목하고 강조하며 손끝으로 옮기는 것. 각별히 여기며 두드러지도록 돋우는 사회 전반의 분위기, 좋지 좋아. 분명 좋은 일이나.. '토씨 하나 찾아 천지를 도는' 시인의 심경을, 쉽게 씌어진 것이 아닌 게 분명한 詩에서조차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 토로하는 시인의 심경을, 헤아려보는 것. 이것이 쓰기前, '본다는 것'에 해당한다면 조금 더 세심할 필요 있지 않을까. 먼저 독자에서 출발하여, 보는 것 어떨지. 쓰려는 욕망에 휘둘리면 권태의 비명에 지나지 않는 글로써, 이미 그러한 글들로 수다한 세상을 다시 어지럽히고 마는 데에 지나지 않게 되니. 이는 스스로 저자-되기에서 물러서는 일이 될 것임에 경계함이 마땅하다 생각을 하여 보는 것. 저자 될 가능성을 확인하려는 성급함이 스스로 저자의 죽음을 당기는 것은 아닌지. 그러니 먼저 독자로 탄생, 치루어 봄이 어떨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