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일.
할인과 마일리지를 선택하지 않으시고 항상 이곳에서 책을 들여가시는 선생님께서, 일전에 말씀하셨던 『느낌의 0도』 들여가셨다. 일러주시는 만큼 서점 DB 늘이는 것만도 고마운 일인데.. 알고 계셨으니 다른 경로로 얼마든지 들이실 수 있는 것을 사각공간에서 들여가시니 보시 아니고 무엇일까..
도서관 독서모임서 알게 된 선생님께서 재방문, 책 두 권 들여가심. 『사랑의 미래』와 『처음부터 없었던 것처럼』. 전에도 이른 바 있지만 이 선생님과는 연배 차이만 스무 해 가까이. 마주하여 함께는 있지만 온전히 함께라 이르기도 어려운 것이 사이를 가로지르는 세월의 강폭 때문. 그 세월을 아직 살아내지 못한, 건너지 못한 나로서는 이미 살아내어, 건너서 닿은 저편을 짐작하기 어렵고 넘볼 수도, 아니 내 딛고 선 이 자리 너머 저편을, 보려한들 볼 수 없으니 건넨다고 드리는 말씀인들 저편에 닿을 리 만무. 그럼에도 불구하고 헤아려 살피주시는 바 그 세월은 흘러, 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 스며들어 깊은 굴을 파기도 하는 듯. 침식의 세월, 슬픔도 함께했을 그 시간이 빚어낸 너그러움. 측량? 할 수 없을뿐더러 잣대/기준 들이대는 자체가 이미 예(禮)를 벗어난 길일 듯..
이렇게 주시니, 이르자면 관심(關心)이고 關을 엮어[係] 界로 확장함이겠다. 이는 마음[心]을 보는[觀] 것이겠고(하나님은 심중을 보신다 했던가). 이는 동시에 관념(觀念), 念을 觀할 때 뒤에 사람이 보이지 않는, 사람을 보지 못하는 형편의 반증이기도 한 것. 따라서 공간의 지속성과 점주의 생활을 꾸리는 소용이라면 고스란히 업(業)으로 쌓일 터.
쌓으려 들면 업이요 비우자면 전할 밖에. 무주처(無住處)가 도리임은 이미 말로 세워진 바, 여시아문(如是我聞)이니 그저 따라 걸을 밖에.
도처(到處)에 난처(難處)인 분들께 임시로 육신 가운데 거하는 기간, 이 삶[生], 살아가는 동안의 방편. 정주할 거처로 내면 다듬기.
이의 축조 위한, 공부(工夫)-되기(명실상부, 明과 實이 비로소 相符!).
이로써 무주처(無住處)로 쉬프트(shift)하기 위한 토대 마련.
Layer. 1
(…)
도처에 앉아 있는 나비들이,
이제는 거의 날지도 않으면서, 늙어가고 있었다.
_파스칼 키랴르, 『로마의 테라스』 中
Layer. 2
나는 그를 내 앞에 세워두고 그의 신상기록카드를 집어들어 읽었다. (…) 동산과 부동산의 액수를 쓰는 난에는 각각 한자로 '別無'라고 적혀져 있었다. 그 한자는 획에 내지르는 힘이 빠진 어거주춤한 글자로 그의 무산(無産)을 의심할 수 없이 확실히 보증해주었다.
(…)
"면허가 있는데 왜 중기 일을 그만두었나?"
"면허가 취소됐습니다. 회사에서 쫓겨났지요. 아니 내 발로 걸어나왔습니다."
"말이 어렵군."
"저도 잘 설명하기가 어렵군요."
생판 처음 대면하는 남이 밥을 벌어야 하는 일과 조직의 상급자라는 이유만으로 자신의 삶의 내용과 궤적을 고백해야 하는 절차의 수모스러움이 장철민의 표정에 떠올랐다.
그의 아랫입술이 더 깊이 안쪽으로 말려들어갔다.
그는 고개를 숙여 구두끝에 시선을 박았다.
(…)
나는 그의 중기면허취소에 관하여 더이상 캐묻지 않았다.
_김훈, 『빗살무늬토기의 추억』 中
Layer. 3
목숨을 걸지않는 한, 결단은 없다.
목숨을 걸지않는 '투쟁'은 거짓이다.
비인간의 삶에 미련을 갖는 자는 결코
인간으로서 죽을 수 없고, 따라서 결코
인간으로서 살 수 없다.
_『전태일 평전-어느 청년노동자의 삶과 죽음』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