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sign?
De(formation) SIGN!
철학을 한다는 것은, 현재의 예술은 물론 과거의 예술과도 공명하고 간섭하면서 개념들을 제작하는 일
철학은 "생각되지 않은 것"이라는 이 기묘한 지대로 텀벙 빠져드는 예술이며,
그 지대는 클리셰와 기성 관념들을 불안정하게 한다.
_『들뢰즈 커넥션』 中
layer. 1
소유를 드러내는 표식으로써 호격呼格(apostrophe).
M-C-M' 을 C-M-C'로 되돌리기(feat. 맑스).
기성(旣成), Sign으로 묶인 관계. 이 틀거리[格]에 박제된 삶을 복원.
자연(自然), 본래 상태로 되돌리기.
해방(解放), 해체와 동시에 재구성.
_이미지 출처 : 밥 길,
『이제껏 배운 그래픽 디자인 규칙은 다 잊어라. 이 책에 실린 것 까지』
layer. 2
애벌레는 잠재적으로 나비이다. 애벌레 안에는 장차 나비가 되었을 때의 세포 하나하나의 무늬, 색깔 냄새까지 다 들어 있다. 애벌레는 나비로 데포르마시옹하기 위해 존재한다. 단백질 덩어리로밖에는 보이지않는 애벌레의 내부 어딘가에는 날고자 하는 욕망이 숨어 있을 것이다. 내 시는 그 욕망을 시의 영감으로 삼는다. 아울러 그 욕망의 변용이 나의 시의 형식이다. 나의 이렇게 닫힌 몸 속에는 그 변용을 가능케하는 어떤 공장이 있다. 보이진 않지만. 즉, 현실을 꿈으로 만드는, 쉴새없이 아버지의 공장들을 무화시키려 가동하는 공장이 있다. 꿈의 공장, 혹은 꿈의 나라의 통치는 수사학으로 이루어진다. 그 나라에선 검은 쓰레기 봉투처럼 묶인 내 몸의 경계가 사라지고 없다. 영화가 현실이며, 간통이 하나의 관습이다. 그 나라에선 무대와 객석이 하나며, 유치장과 심문대가 하나다. 내 몸이 외부와 섞여 한없이 넓어진다. 애벌레가 꾸는 꿈의 디테일, 움직임, 말, 변용이 애벌레의 몸을 무한대로 감수 분열시킨다. 꿈이 애벌레의 현실을 강화하고, 왜곡시키며, 단조로운 순환 속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꿈이 애벌레 내부의, 혹은 외부의 모든 거울을 깨준다.
그러자 햇빛 속에 나비가 한 마리 날아간다. 꿈조차 사라지고 한 편의 시가 완성되었다. 어딘가에 비밀의 출구가 있을 것이다.
_김혜순 시집 『달력 공장 공장장님 보세요』 표4
개업!! 2018년 4월 23일!!
'책의 해, 책의 날, 서점 OPEN이라니! 우왓!!'
혼감(혼자 감격), 혼뿌(혼자 뿌듯)했습니다.
이런저런 일에 치이며 정신없이 살다 문득!
그렇게 번쩍하나 싶은 찰나, 지나고 정신차려보니 벌써 회사 문밖이데요 '_'
그렇게 (비)자발적 퇴사 후 이튿날부터 인근 도서관 찾았습니다.
책을 팠지요. 전에도 파긴 했지만.
이번엔 묻었습니다. 묻어버렸다구요. 저를.
'길, 있다 하니 뭐라도 되겠지'
백일. 꼬박 백일 동안 쑥/마늘 씹듯 책장을 넘기며 문장을 새겨보았습니다.
뭐랄까 곰처럼 '사람'으로 거듭나길 빌고 또 빌면서.
물론 넘기며 새기는 그대로 고스란히 들이진 못했습니다.
그럼 좋겠지만.. 당장은 인간(人間) 아닙니까.
사람[人]으로 향하는 여정 가운데, 그러니까 그 길 위에서[路上:間] 서성이는 존재잖아요.
어쩌겠어요, 이게 저인 것을;;
불완전한 모습 긍정하자 싶더군요.
부정하지 않고 외면하지 않는 데서 '불완전(不完全)'이라는, 그 '빈 구석'이 비로소
美로 드러나는 게 아니겠나 하는 생각도 들고 말이죠.
인간美, 이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딴짓하느라 여념(餘念)이 없다'는 것이야말로 인생의 진면목 아닌가 이 말입니다.
딴짓이면 어떠냐 이거지! 그에 충실하여 여념 곧 다른 생각/걱정에 틈을 내어주지 않을 수 있다면!
이런 자세야말로 진정한 생활인이자 앞서 길 위를 걷는 자[道人]의 참 모습 아니겠습니까. 그찮아요?!
고래(古來)의 성현들을 비롯하여 성철 스님까지 여러 차례 반복하여 이르신 말씀,
'밥 먹을 때 딴짓 마라'
이를 좀 더 적극적으로 수용, 창의적으로 변용, 그리고 적용.
저마다 리듬대로 살(리)면 되는 거죠 뭐.
밥 먹을 때 밥만 생각하는 것, 옳습니다. 맞아요. 헌데
밥술 떠 넣고 씹는 동안 다른 걸 떠올리고 그에 몰입 쫓게되거든 쫓음 됩니다. 아니 될 게 뭐 있습니까?
실컫 쫓다 정신 돌아왔음 그에 책임지면 되는 거고요.
식사 준비부터 치우기까지. 당연하잖아요.
그런데 이게 가족(희미하여지긴 했지만) 울타리를 넘어선 사회가 되면
식사(食事), 정말이지 먹는 것도 '일'이 되어설라무네..
시간을 30분 1시간 따로 정하고 지키네 마네.. 아, 정말이지 지긋지긋, 생각하니 지끈지끈 오메 혈압.
이렇게 이야기 꺼내면 그걸 또 '노동 유연화'라느니 어쩌느니 하면서 '거봐 너희도 좋겠지?' ㅡㅡ
'좆키는 이냥반아! 매인 몸으로 여전(如前)하구만, 정말 좋게 해주려거든 냅둬! 냅두라고 이 XX야!!'
BMG: Let It Be
다시 인간美.
그리하야 입지조건 따져가며 점포 선별 후 In/Ex-terior를 고민해도 시원찮을 판국에
그런 따위 我몰랑~~그저 내면 공사(工事)에만 열을 올렸지요. 그런데 이게 또 맞더라고요.
왜냐하면 공부의 어원(語原)이 주공부(做工夫), 더할 나위 없잖아요?!
이보다 더 명실상부(名實相附) 곧 말이 가리키는 바 그 실체와 서로 들어맞는 경우를 어디서 찾겠습니까.
공부(工夫)'를 하다' 아닌 저 자신 그야말로 건설노동자 진정 공부(工夫)라는 존재로 '거듭 난' 셈이죠.
이 사건/사태를 트랜스폼(trans-form)이라 일러서는 분명(分明)하지 않아 드러나지 않는 것 같습니다.
기성(旣成)을 해체하여 재구성한 바이니 디포메이션:데포르마시옹(De-formation)을 거침으로써! 라고 함이 좀 더 분명치 않은가 싶어요.
돌연:변이, 이게 별게 아닌 거죠. 존재의 변이, 돌연.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만 이게 다 아닌가요??
이색(異色)을 PR하며 그렇게나 자/타(自/他)를 구별지으려 애를 써봐도 결국 마주하느니 무엇인가,
'어차피(於此彼)'라는 울타리. 씁 -_-;
어차피 피/차(彼/此)=일반(一般), 초/록(草/綠)=동색(同色).
그러니 A.D. 기원(基原)의 시발(始發), 예수님도 진즉 일렀더랬지요.
가라사대 '네 이웃을 사랑하라'고. 어차피거든. 네 이웃이고 내 몸뚱아리고 쌤쌤이니 위해주라고(희롱말고 새꺄).
다시 변이. 아, 이러고 나니 길이 보입디다(나니??).
득도(得道), 말 그대로 '길 얻었다'랄까요.
'저자와의 만남 등등의 행사, 각종 전시에 큐레이션, 처방...
정말이지 공+사(公+私)로 어찌나 다망(多忙)하신지.
다른 건 차치하고 저로서는 엄두가 나질 않아서;
아아~~ 전 모르겠습니다. 뭐 하려면 하고. 못할 것도 없겠지만..
그보다 뭐랄까, 서점/책방의 자구책(自救策) 한계를 넘어서면 좋겠다.
뭐시기를 주최하여 이력 한 줄 늘이고.. 참여를 외치며 보고 듣고 뭐 다 좋아 그래 좋을대로 하시고 다만
客이 자기 안의 主를 밖으로 끄집어내는 걸 돕지 못한다면 그거 그냥 소비(消費) 아닌가.
이걸 뭐하러 해?? 그것도 비용 들여가며??
타인의 이목, 관심 끌어 그 주머니에 돈을 과실처럼 추수하는 데 그치고 마는 '책'이라면, '서점/책방'이라면
이미 너무 많잖아!?'
책을 펼쳤습니다.
길을 얻었어요.
서점을 열었습니다.
얻을 수 있을까요, '사람'
이제 한발 내었는데 바라보니 길은 멀고
아.. 끝이 보이질 않는군요.
가다 자빠진들 어쩌겠어요. 하는 수 없지..
(제 몸을 살라 民主의 거름으로 내어준 '사람'도 있었는데 이게 뭐라고;)
그대들이 아는, 그대들의 전체의 일부인 나.
힘에 겨워 힘에 겨워 굴리다 다 못 굴린
그리고 또 굴려야 할 덩이를 나의 나인 그대들에게 맡긴 채
잠시 다니러 간다네. 잠시 쉬러 간다네.
어쩌면 반지[指環, 金力]의 무게와 총칼의 질타에
구애되지 않을지도 모르는, 않기를 바라는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내 생애 다 못 굴린 덩이를, 덩이를,
목적지까지 굴리려 하네.
이 순간 이후의 세계에서 또다시 추방당한다 하더라도
굴리는 데, 굴리는 데, 도울 수만 있다면,
이룰 수만 있다면…….
_『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전태일 유서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