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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common place

홀로 고립적인 확신으로 흘러가지 않고 자신의 외계를 감지하고 이에 몰두해 있으므로 사물들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현실적인 보통명사, 고유명사가 될 수 있다, 홍신선, 시집, 우연을 점찍다..

1 사유의 반사

 

 홍신선.. 『우연을 점 찍다』는 몇 가지 점에서 주목을 요한다.. 오랜 교단생활을 마감하고 퇴직한 후의 심리적 자장을 품고 있다는 것, 그리고 청년 시절부터 중년에 이르기까지 자신이 천착했던 존재론에 대한 사유의 반사(反射)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왜, 어느 지점에서의 반사인가. 어떠한 반사인가. 우선 다음 시를 보자.

 

     그동안 나는

     허공에서 허공을 꺼내듯

     시간 속에서 숱한 시간들을 말감고처럼 되질로 퍼내었다

     말들을 끝없이 혹사시켰다

     (…)

     이제 다시

     어디에다 무릎 꿇고 환멸의

     더 깊은 이마 조아려야 하는가

     _「퇴직을 하며」 부분

 

 자신의 작업이 허공에서 허공을 꺼내고 시간 속에서 시간을 꺼내는 행위였다고 토로하는 목소리는 특별히 결곡하게 들린다. 그는 지금까지 허공 속에서 꽃이나 새, 구름을 꺼냈던 것이 아니었으며, 시간 속에서 시간을 제압하는 비시간을 보았던 것이 아니라고 하고 있다. 그는 일면 무용하다고 할 수도 있는 추상적 행위 속에 자신이 그동안 있었음을 고하고 있다. 허공 속의 허공, 시간 속의 시간이라는 것, 그는 그 허공 밖으로, 시간 밖으로 머리를 내밀지 않았다. 지금까지 지순하게 그러한 것들에 머리를 숙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것들이 허공이었다고 통찰하는 순간, 그리고 지금 또 어느 허공과 시간에, "어디에다" 머리를 숙여야 하는지 묻고 있는 순간, 이러한 물음, 반사는 이번 시집을 특징짓는 지난한 표정으로 보인다.

 

 

2 숙임과 숨음

 

 ..홍신선 특유의 '머리숙임'은 까다로운 함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머리숙임이란 무엇인가. 그것은 대상의 호출이다. 머리를 숙인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대상을 불러들이고 현실화시키는 것이다. 대상이 있어서 머리를 숙이는 것이 아니라 머리를 숙임으로써 대상이 존재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대상을 통해 내가 현실이 된다. 이것은 삶의 불투명성에 대한 저항의 한 방식이라 할 수 있다. 내가 현실이기 위해서 내가 숙지해야 하는 대상들, 현실의 목록들이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물론 세계와의 합일이나 일치에서 찾아볼 수 있는 직접성과 즉자성은 여기에는 나타나지 않는다. 머리 숙인 존재는 그렇게 단번에 드러나는 직시성과는 관련이 없다. 그는 자신을 드러내거나 보여주려는 것이 아니라 머리 숙임으로써, 대상이라는 현실을 세우고 그것을 간직하려는 것이다. 그것을 통해 존재하려 한다. 자신이 간직하게 된 현실이 생의 불확실함과 때로는 불가능을 감내하고 나아가게 해주기 떄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숙인다는 것은 표류를 잠재우는 것이다. 홍신선의 숙임, 세계를 불러들이는 방식, 그것은 농촌이나 고향, 이웃, 시대를 현실화시키는 것이었고, 그것을 통해 자신이 삶의 현실이 되는 것이었다. 이로써 그는 젊은 시절의 수사적 은닉을 뚫고 세계에 가담하는 감각과 눈을 만들어갈 수 있었다.

 

.. 홀로 고립적인 확신으로 흘러가지 않고 자신의 외계를 감지하고 이에 몰두해 있으므로 사물들은 이러한 관계 속에서 현실적인 보통명사, 고유명사가 될 수 있다.

 

 몰두의 가장 깊은 자세는 머리 숙임일 것이다. 과거나 미래의 어떠한 시간들,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 운명의 힘, 자연이나 세계의 원리, 사회나 관습, 생활 습속의 변화 등등의 그 무엇인가에, 아니면 단순히 바로 앞에 있는 다른 사물에 머리 숙임으로써 사물들은 자아의 불확실함 속으로 침몰하지 않고 현실의 부표 위로 떠오를 수 있다. 외계가 현실의 견인 역할을 함으로서 존재들이 현실적 감각을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라면 존재는 자신의 외부 세계에 직면하기 전까지는 언제나, 아직 형성되지 않은 채로 현전하는 것이다. 약국과 슈퍼가 약국과 슈퍼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에 "낮게 깊이 몸 숙인" 때문이며 돌은 "눈길 숙이고 구르는 일"에 몰두함으로써 현실적인 돌이 된다.

 

 시인의 눈에 "장대높이뛰기"는 참으로 낯선 것이다. 그는 고추모를 옮겨 심고 "멍석딸기꽃 밑에 마른 짚 깔기"를 함으로써 "고개 묻고 있'다. 고개를 묻는다는 것은 이와 같이 눈에 보이는 구체적인 행위이다. 이 구체성이 존재를 현실적 존재로 만들며 "나날의 이 道와 躬行"으로서 존재는 세계와 연결된다. 여기서 자신이 숙인 대상이 정확히 무엇인지,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인지 한두 마디로 규정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숙임'의 자세인 것이다.

 

     시간의 황량한 헛간처럼 누운

     아비의 곁에서

     나는 채울 수 없다.

     그 헛간을 흙물로는 내가 지껄이는

     정신으로는 다 채울 수 없다.

     내가 불 피운 정신이란

     이 한 칸 토방의 어둠도 밝히지 않는다.

     (…)

     덧없다 누가 정신 하나로 이 들을 견디는가

     한마디 기개로

     이 산들과 마주 견디는가

     쉽게 용서하며 견디며 나는

     들과 산을 안고 살았을 뿐이다.

     살아있다는 것들이

     소리 삭여 잠잠함을 만들어 흐르는 것을

     _「용서하는 법」(『겨울 섬』) 부분

 

 시인은 정신이나 기개와 같은 자아 중심적인 것들을 과신하지 않는다. 그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이 존재하고 있음을 토로하고 있다. 예컨대 위의 시에서 그는 그것이 "시간의 황량한 헛간"이라 말하고 있다. 그가 보기에 정신은 여기에 무력하다. 정신이나 기개야말로 표류적인 것일 수 있다. 그것들은 헛간을 채울 수도 어둠을 밝힐 수도 없다. 헛간을 견디는 일, 이것은 헛간에 머리 숙이는 일일 것이다. "쉽게 용서하며 견디"는 것은 자신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숙이는 행위이다. 숙이면서 "들과 산을 안고 살"아가는 일이다. 그것이 헛간에 대한 인지이며 자신에 대한 감지이다. 그와 같은 숙임은 또한 "나를 줄이고 다시 더 줄여" (「하숙에서」 부분) 가는 일이다.

 

 홍신선의 특유의 '머리 숙임'은 시인의 긴 시력에서 '숨어듬'의 미묘한 맥락으로 연결된다. 고개를 숙이는 것은 숙이는 대상에게로의 숨어듬, 스며듬이라 할 수 있다. 대문자로 세우는 것은 자신이 아니라 자신이 숙이고 숨어든 그 무엇이다. 존재는 숙임을 통해 자신을 보이지 않게 하며 대상 속에 숨어서 존재하고 이동한다.. 그는 세계를 인식하고 이에 대해 발언하려 하기보다는 세계 속으로 숨는다. 그의 시적 자아는 보는 자, 발견하는 자, 인식하는 자, 나아가 대변하는 자라기보다는 숨어 있는 자이다.

 

 ..그에게 한 인간을 에워싸고 있는 공동체, 사회나 삶의 역사라는 것은 무엇인가. 개인들의 부단한 자맥질로 이루어진 퇴적층 같은 것이 아닐까. 그에게 퇴적층은 단지 흔적이 아니라 결이 선명한 삶 그 자체이다. 시인은 이의 깊이와 넓이를, 그리고 살아 움직임을 느끼고 호흡한다. 매번 더 깊은 자맥질로 나아간다. 그러므로 아주 작은 사물이나 순간들 속에서도 그는 이 숨음의 현장을 발견한다.

 

 구절초는 구절초 뒤에 숨으며, 구절초를 명기한 팻말도 역시 구절초 뒤에 숨는다.. 이 숨음의 지속적인 연쇄는 끝이 보이지 않는다. 스스로 솟아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숙이고 숨는 존재들의 파노라마가 이어질 뿐이다. 뜻밖의 생이라는 것은 이 파노라마 속에서 효력을 발휘할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은 무례한 일이다. 이와 같은 풍경은 떨어지는 봄꽃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봄꽃들이 또렷한 소리로 서로 분별되고 가시화되지 않는다. 서로의 앞에서, 옆과 뒤에서 헛소리가 됨으로써 숨는다. 숨어서 헛소리가 된다. 누가 진실한 말을 하는가. 본래적인 말이라는 것은 특수한 경우에서의, 제한된 수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것은 가정된 것이다. 우리가 보거나 들을 수 있는 것은 헛소리의 헛소리, "헛소리들의 뒤통수"일 뿐, 떨어지는 봄꽃들뿐일 것이다.

 

_이수명, 『횡단』 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