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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言]common place

조직/사회에 휘둘리는 것도 사람, 조직/사회를 바꾸고 가꾸는 것 또한 사람!, 에리히 프롬, 존재의 기술 - 동네서점 사각공간(思覺空間), 북클럽 [1인용 사막]


 어떤 사람이 궁극적으로 자기 삶을 소유 쪽으로 지향시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자신의 삶을 소유 쪽으로 지향시키는 사람은 자기 자신과, 자신의 실존과, 자신의 삶의 의미와, 그리고 자신의 생활방식을, 자기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자신이 소유할 수 있는 것들, 자신이 더 소유할 수 있는 것들에 따라서 결정한다. 이제 소유의, 소유하고자 하는 욕망의 대상물이 되지 못할 것은 아무것도 없다. 온갖 유형의 물질적인 것들─자기 소유의 집, 돈, 주식, 미술품, 책, 우표, 동전, 그리고 얼마간은, "수집열"로써 모을 수 있는 다른 것들─이 다 포함된다.


 (…)


 한 사람이 자신의 삶의 방식을 소유 쪽으로 지향시키면, 사실상 무엇이든 소유할 수 있다. 문제는 그 사람이 무엇을 가지고 있느냐 아니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자기가 가진, 혹은 가지지 않은 것에 마음이 쏠려 있느냐 아니냐이다. 무소유 지향 또한 하나의 소유지향이다. 프롬은 금욕주의를 옹호하는 것이 아니다. "존재" 지향은 바로말해 "무소유" 지향과 동일하지 않은 어떤 것이다. 상존하는 문제는 자신의 삶의 목적을 결정할 때 그리고 자신의 정체성을 결정할 때, 소유 아니면 무소유가 얼마만한 자리를 차지하느냐와 관련된 것이다.


 (…)


 소유지향적인 사람은 언제나 자기 자신의 두 발이 아니라 목발을 이용한다. 그러한 사람은 존재하기 위해서, 자신이 원하는 자기가 되기 위해서, 외부의 대상물들을 이용한다. 그런 사람이 그 사람 자신인 것은, 그가 뭔가를 가지고 있는 한에서뿐이다. 개인이 한 대상물의 소유에 의해서 한 주체로서의 존재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는 목적물들에 사로잡히고 그럼으로써 그 목적물들을 소유한다는 목적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


 사랑, 이성, 그리고 생산적 활동력은 그것들이 실행으로 옮겨지는 그 정도만큼만 생기고 자라는 정신적인 힘들이다. 그것들은 다 써버릴 수도 없고 살 수도 없고 혹은 소유의 대상물들처럼 소유될 수도 없는 것들이며, 다만 실천하고 발휘하고 투자하고 수행할 수 있을 뿐이다. 소유의 대상물들─사용하면 소모되어 없어지는─과는 대조적으로, 사랑, 이성, 생산적 활동력은 그것들이 공유되고 이용될 때 자라고 큰다.


 존재지향은 언제나 그 사람의 삶의 목적이 그 사람 자신의 정신적 힘들 쪽으로 향해 있음을 의미한다. 그것은 자기 안에, 외부세계에 있는, 알지 못했던 낯선 것들이 자기 자신 특유의 것들이라는 사실을 인식하고, 그 사실에 익숙해지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것을 배움으로써 그 사람은 자기 자신 그리고 자신의 환경과의 보다 큰 보다 포괄적인 관계를 얻게 된다. 


 (…)


 개인의 운명적인 발전의 뿌리들이 일차적으로는, 사회경제적으로 결정된 오늘날의 인간의 처지에서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 뿌리들을 근거로 하여 나아가는 것이, 그리고 개인을 언제나 사회화되어 왔던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런 이유 때문에 프롬은 "존재를 향한 단계들"에 관한 장(章)을, 구조적 변화들을 위한 그의 제언들로 대체시켰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이유 때문에 소유지향에서 존재지향으로 옮아가고자 하는 한 개인의 노력은 오직 그 노력들이 동시에 그 사람 자신을 둘러싼 환경의 구조를 변화시키는 경우에만 의미있는 것일 수 있다. 직업적 활동에서, 자신이 맡은 작업조직에서, 또 정치적, 사회적 자각에서, 이성, 사랑, 생산적 활동력이라는 자신의 정신적 힘들을 진정으로 체험할 수 있도록, 그리고 그 힘들이 사용함으로써 더 자라날 수 있도록, 그 사람 자신의 사회경제적 생활방식을 이끄는 가치들이 변화되어야만 한다.


튀빙겐(독일), 1992년

라이너 풍크



_<편집자 서문>, E. 프롬, 『존재의 기술』中